20081106 [길을찾아서] 학림다방 앉아 ‘한잔의 추억’ / 백기완

백기완-나의 한살매 25

나는 요즈음도 이따금 대학로 ‘학림다방’엘 간다. 거기서 딴 자리는 안 앉는다. 쉰다섯 해 앞서부터 앉던 바로 그 자리에만 앉아 밖을 내다보면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는 노랫소리가 절로 들려오는 듯, 나는 뉘우침에 소스라치곤 한다.
‘그 새낀 그거 내가 죽였어, 내가.’ 때속(감옥)에서 다 죽게 되었을 적이다. 나와 끈매(인연)를 맺었던 동무들 얼굴이 별똥처럼 스쳐 갔다.

6·25가 터지던 날이다. “기완아, 나 오늘은 밀린 품삯을 받아낼 거그든. 그리 되면 네 중학교 입학금은 내가 낼 테니까” 그러면서 신발 끈을 매고 가던, 쇠 깎는 애 복동이는 낙동강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아, 쪼매난 무덤이라도 하나 만들어 주었어야 하는 건데 아무것도 못하고 나도 죽는구나.’

또 관악산 승방 뜰 구장네 머슴 구럭이도 “내 어떤 일이 있어도 네 새끼에게 돼지기름데이 한술 실컷 먹여 주겠다”고 하더니, 앞장서 싸우러 갔다가 먼저 가고 기어이 나도 가는구나.

또 있다. ‘이’ 때문에 나하고 늘 알각대던 살구라는 녀석은 군대에 끌려가면서 “엄마, 기완이가 살아오거든 내 글묵(책) 그거 세나 있잖아, 그것을 모두 갸한테 줘. 비에 젖어 엉망이긴 하지만 갸가 그렇게도 갖고 싶어 했거든.” 그러면서 싸움터엘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 글묵 <고향>, <임꺽정> 한묵(한권), <청춘극장>을 갸하고 뛰어놀던 남산 삐알(자락)에 무덤처럼 묻어주며 “살구야, 살구야” 불렀었지.

그런데 달록이란 애는 꼭 내가 죽인 것 같아, 나는 그렇게도 괴로울 수가 없었다. 달록이는 부산에서 부두 일을 할 때 사귄 동무였다. 얼굴은 꼭 가시나처럼 예쁘고 눈이 맑고 글파(공부)가 으뜸이었지만, 굿(연극)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홀어머니는 늘 “얘야, 다른 집 애들은 가름네(재판장)가 돼 돈을 잘 번다더라, 너도 그리 되거라” 해서 괴로워하곤 했다. 그러던 애가 서울로 온 뒤 거의 한 해쯤 보이질 않아 ‘옳거니, 녀석은 그 가름네 글파를 하나 보다’ 그랬는데 느닷없이 나타났다. “야 이게 누구야?” 우리는 먼저 쐬주 몇 모금부터 걸치고 대학로 ‘학림다방’엘 올라 커단 소리로 모뽀리(합창)를 했다.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딱 그 말귀밖에 몰라 부르고 또 부르는데, 달록이가 갑자기 찻집 마룻바닥에 누런 가래침을 게운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여기는 노래를 하는 데도 아니고, 가래를 게우는 데도 아니니 나가 다오” 한다. 더구나 둘레에 있던 학생들이 “뭐야 저 새끼들, 에이 밥맛 떨어져” 그러면서 나간다. 나는 냅다 불러 세웠다.

“야 이 새끼야, 이참 뭐라고 그랬어? 뭣 땜에 밥맛 떨어진다는 거야!” 우당탕 벅적이 나는데도, 달록이는 거의 숨이 넘어가는 듯 누런 가래를 쏟아놓는다.
“너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면서 떠나간 지 여섯 달쯤 지나서였다. 다시금 달록이가 나타났다. 그런데 얼굴은 누렇게 떴고 가래침도 엔간히 뱉는 게 아니다. “야, 너 왜 그래?” “괜찮아, 나 무엇 좀 먹고 싶은데 ….” “좋아” 하고 안주 없는 몇 모금을 들이켜는데 주머니에서 뭔가 떨어진다. ‘기다리지 말아다오, 이참은 갈마(역사) 그 나아감하고 사랑할 때요.’ 또 있었다. ‘우리 꼭 만나야만 되겠니? 서로 뜨겁게 사는 거, 그게 만나는 거 아니겠니, 내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놀라 “너 이참 어디서 뭘 하는 거가?” “나? 사람 사는 데서 참굿(실극)을 하고 있지.”
“그게 어딘데?” “내 가래침에 써 있을 걸. 그러나저러나 한모금만 더 했으면.”

그러구선 강원도 어느 탄광 막장에서 진폐증으로 죽고 말았다.

그래서 때속 골방에서 다 죽어 가면서도 나는 울부짖었던 것이다. ‘그 새낀, 그거 내가 죽였다. 바로 옆이 서울대학병원, 그 들락(문)을 부시고서라도 그 녀석을 들이밀었어야 하는 건데. 기완아! 이 새끼야, 이 쩨쩨한 새끼야’ 그러면서 죽어 가던 때가 엊그제인데 ….

나는 다시 ‘학림다방’ 옛날 바로 그 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날에 쓰러진 달록이가 떠오른다. 그를 거울처럼 오늘의 대학로 젊은이들을 비춰 본다.

봄도 없이 가랑잎부터 구르는 이 가을, 어디로 가고 있을까? 매인네(소시민)의 늪으로 빠져 개죽(피지 못한 닢)이 되는 건 아닐까 …. 문득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구나.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는 노래. 통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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