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19 동아일보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학림은 안 잊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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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학림은 안 잊었노라”

 

54년째 대학로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학림다방. 서울대학교 문리대가 대학로에 자리 잡고 있던 시절이니, 까마득해도 너무 까마득한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이곳은 카페라는 호칭보다 ‘다방’이 어울리고, 번드르르한 테이블보단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어있는 탁자가 더 어울린다.

이곳을 찾은 손님들은 ‘1956년, 학림다방’이라는 간판의 아우라에 사로잡혀 다방 입장과 동시에, 이 집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바쁘다. 그런데 정작 학림다방 주인은 배시시 웃으며 그런 ‘숨은 그림’ 따위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 학림의 자랑은 ‘음악’. 품질 좋은 스피커와 클래식 LP판들이 학림 커피를 더 맛있게 만들어준다. 요즘은 사실 CD도 많이 틀고 있다는 귀띔.

“하나도 바뀐 게 없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다 조금씩 개조하고 바꾼 것들이거든.”

학림이 50여 년 동안 살아남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추억만 팔아서 장사하진 않겠다는 굳은 다짐. 덕분에 학림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이면서, 변화에 민감한 ‘젊은 다방’이 되었다.

지금이야 로스팅 커피 한 잔 안 마셔본 사람이 드물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커피 문화는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싸구려 헤이즐넛 커피를 음미하며 나름 흡족하게 CF 주인공 같은 표정을 지어대던, 한마디로 커피 문화의 암흑기였다. 그때 학림다방은 이미 로스팅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온 손님이 혼자 중얼거린 푸념이 역사 깊은 학림다방의 메뉴를 일순간에 바꿔놓았다.
▲ 옛날엔 이렇게 복층으로 이루어진 다방이 참 많았다. 2층에는 늘 단골들이 뿜어내는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한층을 알뜰하게 나눠 쓴 이층 구조가 정겹게 느껴진다.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 영화 <강원도의 힘> <번지점프를 하다>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음악도 좋고, 분위기도 좋은데, 커피 맛이 따라주지 않네요.”

학림다방 사장은 일본 손님을 붙들고 어디 가면 맛있는 커피를 먹을 수 있는지, 어디 가면 맛있는 커피 만들기를 배울 수 있는지 캐물었다. 그리고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카페 순례를 다니며 맛좋은 커피를 마시고 다녔다. 로스팅 커피의 기본 재료도 함께 공수해왔다.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먼저 맛좋은 커피를 팔기 시작한 학림다방은 이제 머리 희끗한 단골과 커피 맛을 아는 젊은이들이 함께 어우러진 독특한 공간이 되었다. 80대와 20대가 함께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공간. 그게 ‘안 바뀐 듯 모든 게 바뀐’ 학림다방의 현재 모습이다.
▲ 학림단골 ‘출신’의 이름을 호명하면 우리나라 정치, 문화, 예술가들의 지도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방명록에는 그들이 적어 놓은 글귀가 수두룩하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학림은 안 잊었노라”는 홍세화의 글부터 “그 이름 오래 이어지소서” 같은 고은의 축사까지, 경매에 내놓으면 몇 십 억 값어치는 충분한 보물들이다.

이곳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건 오직 방명록뿐. 몇 십 년 간 학림의 단골들이 휘갈겨 쓴 방명록에는 고은, 홍세화 같은 문인들의 애정 어린 문구와 더불어 199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친필로 쓴 글귀도 남아 있다.

“오늘 또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기쁩니다.”

주인장은 이 문구에 자신의 기억을 덧붙인다. “대통령이 되기 직전이었을 거야, 아마. 가수 김민기 씨와 함께 저녁을 보내다 가셨는데, 그 시간이 참 즐거우셨나봐.”

방명록을 함께 넘겨보고 있으니 학림에서 놀다간 사람들의 수많은 얼굴들이 눈에 훤히 그려진다.

과거의 시간을 짐작하며 오늘의 시간을 만끽하는 즐거움. 이게 바로 학림다방의 유서 깊은 ‘숨은 그림’이자 엄청난 보물인지도 모르겠다.

글·황희연<BRUT 기자>